서 론
조현병유발 어머니는 1948년 프리다 프롬-라이히만(Frieda Fromm-Reichmann)이 한 임상기법 논문에서 단 한 문장으로 명명한 개념이다(Fromm-Reichmann 1948). 이 개념은 1948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미국 정신분석 임상에서 조현병의 일차 병인을 어머니의 양육 태도로 돌리는 표준 모델로 작동하였고, 리츠(Lidz), 윈(Wynne), 베이트슨(Bateson), 보웬(Bowen)으로 이어진 가족 이론의 확장 속에서 가족 전체를 정신증의 병원체로 재구성한 거대 이론군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1966년 이후 약 30년에 걸쳐 가설은 실험적 검증의 실패, 입양·유전 연구, 표출 정서 연구, 장기 추적 연구, 그리고 가족 옹호 운동의 합류 속에서 해체되었고(Parker 1982; Neill 1990), 1990년대 이후 학계에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럼에도 가설의 잔영은 자녀의 발병 앞에서 스스로를 탓하는 어머니의 자책으로 진료실에 남아 있다. 존스턴(Johnston 2013)이 이를 “유령”이라 부른 것은 학문적 폐기와 임상적 잔존 사이의 어긋남을 가리키기 위해서였다. 본 종설은 이 가설을 명명자 프롬-라이히만을 중심에 두고 재조명한다. 곧 그녀의 생애와 임상 사상, 한 문장이 정전으로 격상되기까지의 이론적 확장, 그 배경이 된 전후 미국의 모성 담론, 가설의 해체 과정, 그리고 정신분석 임상에 보존되는 유산을 차례로 검토한다.
Fromm-Reichmann의 생애와 임상 사상
프리다 라이히만은 1889년 독일 카를스루에의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 의대를 졸업하고 신경학자 쿠르트 골트슈타인(Kurt Goldstein) 아래에서 수련하였다(Hornstein 2000). 1924년 하이델베르크에 정신분석 요양원 Therapeutikum을 세워 정신분석을 협력적 작업으로 본 임상철학을 처음 구현하였고, 1929년에는 Karl Landauer, 에리히 프롬(Erich Fromm) 등과 함께 Frankfurt Psychoanalytic Institute를 창립하였다. 이 기관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의 사회연구소와 긴밀히 교류하였다(May and Mühlleitner 2011). 나치의 집권으로 1935년 미국에 망명한 그녀는 메릴랜드의 Chestnut Lodge에서 22년간 임상과 저술을 이어 갔으며, 환자들은 그 헌신적 분석 태도를 “Torah-peutic”(Torah와 therapeutic의 합성)이라 불렀다(National Park Service n.d.). 자전적 소설 “I Never Promised You a Rose Garden”(1964)의 ‘Dr. Fried’가 바로 그녀이다(Greenberg 1964).
라이히만이 Chestnut Lodge에서 시도한 작업의 핵심은, 정통 정신분석이 “전이를 형성할 수 없다”며 분석 대상에서 제외했던 정신증 환자에게도 정신분석이 가능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Freud 1914). 그녀의 임상 명제는 분명하였다. 정신증 환자의 의사소통은 환자 자신에게는 의미를 지니며, 임상가의 첫 과제는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신증 환자도 전이를 형성하고, 그 후퇴는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어쩔 수 없이 택한 후퇴이며, 따라서 견고한 작업관계의 수립이 통찰보다 앞선다(Fromm-Reichmann 1948; Bullard 1959).
“The schizophrenic is painfully distrustful and resentful of other people, due to the severe early warp and rejection he encountered in important people of his infancy and childhood, as a rule, mainly in a schizophrenogenic mother.” (우리말로 옮기면, “조현병 환자는 영유아기에 자신에게 중요했던 인물—대개는 주로 조현병유발 어머니—로부터 겪은 심각한 초기 왜곡과 거부 때문에, 타인을 향해 고통스러울 만큼 깊은 불신과 원망을 품는다.”) 이것이 ‘조현병유발 어머니’라는 표현이 출판 문헌에 처음 등장한 대목이다(Fromm-Reichmann 1948, p.265). 그 임상적 의도는, 환자의 깊은 불신이 제멋대로의 적대가 아니라 발달기 외상에 뿌리를 둔 의미 있는 적응임을 임상가가 이해해야 라포가 형성된다는 지침이었다. 가설을 뒷받침하는 통계도 통제군도 뒤따르지 않았으며, “as a rule”과 “mainly”라는 한정어가 보여주듯 이는 가설이라기보다 임상 인상의 표현이었다.
여기에 라이히만 임상 사상의 양면성이 있다. 그녀는 정신증 환자의 의사소통이 지니는 의미를 강조하면서도, 그 뿌리를 어머니에게서 비롯된 초기 외상으로 돌리는 발달적 가설을 동시에 받아들였다. 호른슈타인(Hornstein 2000)의 평전이 시사하듯, 그녀가 조현병유발 어머니를 경고할 때 그것은 통제된 관찰이라기보다 진취적이면서도 지배적이었던 자신의 어머니 클라라와의 양가적 동일시가 환자 사례로 확장된 결과에 가까웠다. 이 양면성은 학문 차원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정신증을 치료하는 분석가는 극심한 무력감과 때로 역전이적 증오를 겪는데(Winnicott 1949), 어머니를 병인으로 지목하는 일은 치료 정체의 책임을 가족에게 돌리는 동시에 분석가의 전능 환상을 지키는 역전이 방어였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가설은 분석가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투사적 동일시의 산물로 재해석된다(Bion 1962).
조현병유발 어머니 가설과 그 확장
라이히만의 명명은 약 20년에 걸친 선행 흐름이 결정화된 것이었다. 해리 스택 설리번(Harry Stack Sullivan)은 영아가 어머니의 불안을 흡수해 자기체계에 결손을 입고 이것이 조현병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으나, 근거는 통제군 없는 남성 환자 6명뿐이었다(Sullivan 1927; 1953; Hartwell 1996). 데이비드 레비(David Levy)의 과보호 어머니 유형론(Levy 1943)과, 환자 45명 중 33명에서 과보호·2명에서 거부를 보고한 카사닌 등의 후향적 사례연구(Kasanin et al. 1934)가 그 토대를 놓았다. 1940년대에는 여성 분석가들(Despert 1938; Hajdú-Gimes 1940)과, “moms”라는 신조어로 모성 비난을 대중화한 와일리(Wylie 1942)·스트레커(Strecker 1946)의 대중서가 가세하였다. 1948년의 한 문장이 곧바로 가설로 격상된 것은 이러한 학문적·문화적 토양 위에서였다.
명명 직후 개념은 빠르게 정형화되었다. 티체(Tietze 1949)는 어머니 25명 전원을 “지배적·과돌봄적”으로 분류하면서 거부의 증거가 없는 18명조차 거부를 “추정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고, 라이하르트와 틸먼(Reichard and Tillman 1950)은 드러난 거부와 “은폐된 거부(smother love)”를 구분함으로써 어머니의 어떤 행동도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회수되는 반증 불가능한 분석틀을 정착시켰다. 다만 이러한 관찰의 상당 부분은 이미 발병한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반응적 적응, 곧 역인과일 가능성이 있었으나 당시 설계는 이를 통제하지 못하였다.
가설은 곧 어머니에서 가족 전체로 확장되었다. 예일의 리츠(Lidz et al. 1957)는 입원 조현병 환자 16가족을 관찰해, 부부가 만성적으로 반목하며 자녀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부부분열(marital schism)’과 한쪽 배우자가 다른 쪽의 병리에 수동적으로 동조해 가정 전체가 일그러지는 ‘부부왜곡(marital skew)’을 구분하였다. NIMH의 윈(Wynne et al. 1958)은 표면적 친밀 아래 정체성 표현을 차단하는 가짜상호성을, 윈과 싱어(Wynne and Singer 1963; Singer and Wynne 1965)는 투사검사로 측정되는 부모의 의사소통 일탈을 제시하였다. 팰로앨토의 베이트슨(Bateson et al. 1956)은 자녀를 가두는 이중구속을, 보웬(Bowen 1960)은 가족 정서의 투사 표적이 된 자녀가 발병한다는 가족체계 이론을 내놓았다. 같은 시기 자폐의 “냉장고 어머니” 가설(Kanner 1943; Bettelheim 1967)이 나란히 일어났다 폐기된 사실은(Rimland 1964), 이것이 정신증 전반을 가족 인과로 설명하려던 한 시대의 체계적 시도였음을 보여준다. 1948년의 한 문장에서 1965년 리츠의 단행본 정전(Lidz et al. 1965)까지 약 17년이 걸린 격상의 동력은 새로운 통제군 자료가 아니라 정신증을 임상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신분석의 야심이었다.
시대정신과 모성 비난
가설이 사반세기 동안 권위를 유지한 배경은 임상 자료의 설득력이 아니라 시대의 사회적 긴장이었다. 20세기 전반 미국의 이혼율 증가, 여성 참정권 확립, 전쟁기의 여성 노동 진입은 모성에 대한 사회적 불안을 키웠다(Chafe 1972; Hartwell 1996). 정신과 의사들이 어머니의 “이루지 못한 야망”을 병인으로 지목했지만,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 야망은 미국 주부 다수의 평범한 내면 풍경이었다(Schlesinger 1958; Converse et al. 1980). 이론적으로도 가설은 미국적 담론에 머물지 않았다. 프롬-라이히만이 창립 멤버였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은 가족을 권위주의 구조의 재생산 통로로 규정하였고(Horkheimer 1936), 그녀는 1940년 이를 직접 인용하였다(Fromm-Reichmann 1940; Hartwell 1996).
가설의 임상적 결과는 진료실에서 어머니에게 가해진 상처였다. 1950–70년대 정신분석 임상이 가족에게 전한 표준 메시지는 “환자의 병은 당신들의 책임이니 죄책감을 안고 떠나라”는 것이었다(Goldstein 1981). 레플리(Lefley 1989)는 이 시기 어머니들이 겪은 의원성 손상을 정리하였고, 캐플런과 홀-매코쿼데일(Caplan and Hall-McCorquodale 1985)은 주요 임상학술지 분석을 통해 어머니가 72가지 진단의 원인으로 비난받고 있으며 여성운동에도 불구하고 그 빈도가 줄지 않았음을 보였다. 일찍이 체스(Chess 1964)는 임상가의 구호가 “실제 자료가 아니라 상상적 대용물”에 근거한다고 경고하였으나, 시대의 관성을 막지는 못하였다.
가설의 해체
해체는 검증의 실패에서 시작되었다. 이중구속 가설을 세운 전문가들조차 평정자 간 일치도가 r=.19에 그쳐 유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고(Ringuette and Kennedy 1966; Schuham 1967), 부모의 의사소통 이상은 자녀의 발병에 선행하기보다 반응적이었다(Liem 1974). 결정적 균열은 입양·유전 연구에서 왔다. 출생 직후 분리되어 조현병유발 어머니를 경험한 적 없는 고위험 자녀 47명 중 5명(연령보정 이환위험 16.6%)이 조현병으로 진단된 반면 통제군 50명에서는 한 명도 없었고(Heston 1966), 조현병은 입양아의 생물학적 친척에서 통제군의 약 10배(5.0% 대 0.4%)로 집중되었다(Kety et al. 1994). 한편 양육환경의 영향은 유전 취약성을 지닌 자녀에게서만 나타나(Tienari et al. 2004), 단일 원인으로서의 어머니 인과론은 더 이상 지지될 수 없었다.
영국 사회정신의학은 가족의 자리를 원인에서 경과로 옮겼다. 고표출정서 가정 환자의 9개월 재발률은 저표출정서 가정의 약 3.5배(58% 대 16%)였고(Brown et al. 1972; Vaughn and Leff 1976), 메타분석은 그 효과크기를 r=0.31로 확정하였다(Butzlaff and Hooley 1998). 파커(Parker 1982)는 표출 정서의 비판·과관여가 과거 어머니에게 돌려졌던 거부·과보호와 평행함을 지적하며 옛 가설이 인과의 방향을 거꾸로 포착했다고 보았고, “고유한 의미의 조현병유발 어머니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약 75편의 문헌에도 이 어머니가 존재한다는 통제된 증거가 없었다는 닐(Neill 1990)의 회고가 이를 뒷받침한다. 라이히만의 본거지 Chestnut Lodge의 장기 추적에서도 환자의 약 2/3가 주변적 기능 이하에 머물러, 정신분석적 입원치료가 경과를 바꾸지 못함이 드러났다(McGlashan 1984; 1986; 1988; Hirsch and Leff 1975). 끝으로 항정신병약물 도입과 탈시설화, 페미니즘 비판, 그리고 “더 이상 자식의 병으로 비난받지 않겠다”는 어머니들의 가족 옹호 운동이 해체를 가속하였다(Harrington 2012; 2019; Chesler 1972; NAMI Illinois n.d.).
정신분석적 유산: 폐기와 보존
폐기되는 것은 “어머니가 원인”이라는 단일 인과 모델과 그것을 만들어 낸 인식론적 절차이다. 곧 통제군 없는 임상 인상의 학문적 격상, 무한히 회수되는 개념의 진단 도입, 환자의 가족을 병원체로 호명하는 임상 태도이다. 현대의 통합적 관점은 양육환경을 일반 인과가 아니라 유전 취약성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또 정신증 위험을 높이는 식별 가능한 아동기 역경(통합 OR 2.78)의 한 요인으로 재배치한다(Zubin and Spring 1977; Tienari et al. 2004; Varese et al. 2012). 핵심은 ‘어머니라는 관계’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자리에 다시 놓인다는 데 있다.
보존되는 것은 라이히만 임상 사상의 핵심 명제—정신증 환자의 의사소통은 환자에게 의미가 있으며, 임상가는 그 의미를 인정함으로써 작업관계를 세운다—이다. 정신증 환자도 분석 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이 태도는 영국 대상관계 학파로 이어졌다. 위니콧의 “충분히 좋은 어머니”는 완벽한 모성에 대한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조현병유발 어머니 담론과 대비되고(Winnicott 1949), 비온의 담아내기 이론은 어머니를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영아의 원초적 경험이 사고로 전환되는 최초의 장으로 본다(Bion 1962). 가족을 병의 책임자가 아니라 심리교육과 치료동맹의 대상으로 보는 모델 역시 이 전환 위에 서 있다(Lefley 1989; Seeman 2009).
결 론
조현병유발 어머니 가설의 70여 년에 걸친 융성과 해체는 두 가지를 일깨운다. 한 임상기법 논문의 한 문장이 정전으로 격상되기까지의 동력은 새로 축적된 데이터가 아니라 정신분석의 학문적 야심과 한 시대의 모성 담론이었으며, 그 폐기에는 입양 연구에서 가족 옹호 운동까지 약 30년의 합류가 필요하였다. 발병의 원인을 어머니에게 돌리는 가설은 폐기되었으나, ‘어머니라는 관계’는 발달과 정신증의 임상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이는 가족 중심성이 강한 한국 임상에 특히 함의를 지닌다. 자녀의 발병 앞에서 어머니의 자책은 보호자 면담의 가장 흔한 첫 마디 가운데 하나이며, 효(孝)와 모성에 대한 규범이 이를 이중의 부담으로 가중한다. 가설의 잔영에 대한 임상적 응답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어머니의 자책에 담긴 윤리적 책임감을 치료 동맹의 토대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원인을 묻기보다 동맹을 맺는 자세야말로, 라이히만이 남긴 임상적 유산을 오늘의 진료실에서 잇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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